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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4. 4. 10. 08:50

마사 너스바움 M.Nussbaum - 혐오와 수치심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마사 너스바움 - 혐오와 수치심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혐오’라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수치심 disgrace’와 맞닿아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판단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치심과 혐오 사이를 관통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혐오’가 지배적 감정으로 표출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과정이 되었다.

 

    너스바움이 정의하는 혐오는 오물이나 불쾌한 것, 그리고 모두는 근본적으로 동물이라는 대한 거부감과 연관이 있는데, 이는 오물을 배출하며 살아가는 동물성에 대한 혐오로 환원된다. 많은 문화권에서 ‘혐오의 대상’으로서 투사되는 존재들은 ‘더러움’이라는 감정과 연결된다. 자신의 더러움을 인식하는 동시에 타인이 뿜어내는 불쾌함 역시도 혐오로 환원하는 것이다. 여성, 유색인종, 하위계층, 성소수자들은 여러 문화권에서 ‘성기’ 즉 오물의 배출 혹은 이미 배출된 오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특권계층들이 하위계층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동물성을 혐오와 결부시켜왔음을 지적하며 혐오를 통한 제노포비아가 단일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판단에 개입하는 것은 특정 계층이나 성별, 특성에 대한 부당한 법적 제재를 용인하게 만든다. 반대로 오물로 환원되는 대상과 객체들에게는 단순한 부끄러움을 넘어선 ‘수치심’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동물적 속성이 부끄러우며 사회적 체면을 깎아먹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혐오가 사회를 추동하는 기능이 되었다는 윤리학적 분석은 한국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를 침해하는 성폭력이 오랜 시간 ‘수치심’과 연관되어 사회적, 법리적 감정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너스바움은 '건설적 수치심'을 언급하며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성찰하는 건설적 성격이 타인에게 수치심을 부여하는 현상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수치심을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상황적 필연성에 주목하지만, 수치심으로 형벌을 주거나 낙인을 찍고, 인위적으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법으로 규정된 인간의 존엄성에 영향을 미친다. 수치심은 '발현'될 수 있지만 인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수치심의 맥락적 속성은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분석과도 연관이 있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이성과 감정을 서로 분리하여 이성과 합리성에 우월성을 부여해왔지만 사실 혐오와 차별, 통치성과 관련된 사회적 현상은 입증 불가능한 감정적 현상과 관련이 있다. 유아기의 행동들은 합리적 인과관계와는 거리가 멀지만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수치심을 부여받아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남성들은 성장하면서 이상적인 남성성-맨박스Manbox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지만 너스바움의 언급에 따르면 이 수행성은 남성성을 거부하고 싶거나 명확한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소년들에게 일정 이상의 수치심을 안긴다. ‘사회화’는 구성원들에게 수치심을 안김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면서 기능한다. 수치심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맥락적 발현임과 동시에 정상성에 대한 요구이자, 정상 밖의 속성들을 낙인찍는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너스바움의 ‘건설적 수치심’에 관한 질문은 수치심이 혐오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화된 삶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회적 가치와 상호존중 윤리의 가능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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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3. 11. 20. 17:33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What world is this?

 
 
버틀러가 2020년에 써낸 이 책의 영문명은 <what world is this?>이다. 제목만 읽어서는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지금 현재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이 글을 통해 현재 이 세계가 목도하고 있는 두 가지 위기와 사건-팬데믹과 기후 위기-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둔다. 버틀러는 이 세상은 예측하지 못한 비극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다는 막스 셸러의 사유를 팬데믹의 발생이라는 현상에 접목했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인용하면서 바이러스는 인간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며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염으로서 인식시켰다고 성찰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우리의 삶은 분명 '변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매개체가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무규칙적인 전파일 거라고 예측할 수 없었을 뿐이다. 비극과 삶의 파괴는 언제 어디서든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전염병은 무규칙적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오미크론이나 델타와 같은 변이 바이러스의 이름을 머리에 인식하면서 우리의 삶에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했다. 서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접촉하기만 해도, 서로의 침이 교환되거나 스치기만 해도 바이러스는 전염병을 몸 안에 이식할 수 있다. 서로 완전히 다른듯한 타인의 신체는 바이러스를 통해 메를로 퐁티의 사유처럼 '상호 간에 얽혀'간다.
 
하지만 백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정된 자원이자 특혜가 됐다. 사회 지도층은 백신을 접하지 못하는 계층을 방치함으로써 보호받아야 할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을 구분했다. 또한 가짜뉴스의 시대에 백신이 완벽하게 전염병을 방지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이용하여 안티백서들이 탄생했다. 백신 반대론자들은 백신의 효과성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하여 백신을 통해 실현 가능한 공공의료에서의 윤리적 가치를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윤리학의 입장에서 적어도 백신은 소외계층이 분배받지 못하고 방치될 특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버틀러는 미국 사회에서 백신소외와 같이 공공의료에서 특정 계층이나 집단을 방치하는 현상과 (흑인에게 가해진) 직접적인 구조적 인종차별이 서로 맞물려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버틀러의 다른 저작인 '비폭력의 힘 The Force of Nonviolence'에서도 생명 간의 계급화와 차별은 '애도가치 worthy of grief'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생명 간에 가치계급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윤리성은 논의되기 어렵고, 평등과 공정함은 윤리가 아니라 지배계층에 의해 분배되어야 할 자원으로 인식된다. 팬데믹 세계에서 백신은 생명의 죽음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누군가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한정된 자원으로 재의미화되고 있다. 백신을 수입하고 확보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은 백신이 가치화된 자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은연중에 내재하고 있던 생명 간의 계층격차와 배분받을 수 있는 자원의 한계를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식해간 것이다.
 
   나는 팬데믹이 발생하던 시기에 성착취 피해자들을 위한 공공지원제도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종사했다. 이 시기 나는 전염병이 물리적 한계를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성적 착취를 얼마나 다채롭게 재생산하고 있는지 목격했다. 아무리 격리되어 있고 서로 접촉을 피해도 모든 개인은 타인을 괴롭히고 착취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기술은 마치 '상호 얽힘'을 얼마나 비극적인 방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범위에서 발현시키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팬데믹 시기 이후 표면화된 온라인 아동 성착취의 발생건수가 급증했다는 통계는 타당성이 있다.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64408714)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구술언어가 아닌 디지털화된 글자들을 캡션으로 달고 있는 '복사 가능한' 이미지들을 무한 생산했다. 상호 얽힘으로써 사회화되고 발달해가야 할 아동들은 집 안에 격리된 채 비대면 세계의 언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습했고 이미지의 창작자이자 전파자가 되었으며 '이미지'를 가치화해서 소비하는 시장은 더욱 팽창했다. 내가 종사했던 업무의 강도는 이러한 비대면 성착취의 급증이 큰 역할을 했다.
 
 

코로나19 봉쇄 기간 아동 성 착취물 10배 증가 - BBC News 코리아

'성 착취물을 올린 웹사이트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5000곳이었던 데 비해 6만3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www.bbc.com

 
   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은 아주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나는 당시 피해자들을 위한 대민업무를 맡아보면서 이 지원제도가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 위에 놓여져 있으며 이 직업에 종사하는 인력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도움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현재 당신에게는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들은 때때로 실망했고 얄팍한 국가제도에 불만을 퍼부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라도 도움을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자기위로를 했다. 또한 당신은 거기에 허수아비처럼 앉아있는 거냐고 공격했고 당신은 어떤 사람이길래 거기서 고생하고 있냐는 동정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늘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윤리가 아니라는 고민도 있었다. 당시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자원도 한정적이며, 상대방에게도 정해진 자원을 배분할 수밖에 없다. 가장 사명감과 윤리적 마인드셋을 중시하는 공공제도 종사자에게도 '돌봄'의 가치화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자 가장 타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윤리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 마련되어 있는 성착취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제도는 불편하게도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 저임금 노동자들의 헌신과 도덕심과 윤리적 사명감을 필요로 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심과 성폭력에 대한 분노의 감정, 같은 여성을 향한 자매애는 우리 사회가 공공제도를 저예산으로 구축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성착취 피해지원에 종사하는 여성 근로자들의 '헌신'도 일종의 가치화된 무형의 자원이라 그 헌신이 고갈되면 더 이상 제도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없고, 피해자들을 위한 '자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공성'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자원화되고 배분 가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다시 생각했다.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물질적이고 고갈 가능한 것인지, 우리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노동력이 헌신으로 치환될 때 얼마나 이 사회가 여성과 성의 문제를 한정된 자원 내에서 해결하거나 방치하고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수치'를 강요당한 이들의 '최소한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위해서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연대해 나가야 할까? 
 
  버틀러는 공동체가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앞서 어떻게 전지구적 상호돌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하면서 팬데믹과 기후 위기가 우리가 얼마나 상호 연결된 존재인지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페미니즘 돌봄 네트워크와 사회적 운동, 서로 다른 신체들간의 연대와 거리의 정치는 이 책뿐만 아니라 여러 저작에서 버틀러의 예시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대하고 새로운 윤리적 실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거 성폭력 피해지원 종사자로서 하나의 예를 들었지만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돌봄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가치사회에서 배제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 정부의 여성가족부 예산 삭감으로 인해 소외계층의 돌봄으로 실현되는 공공윤리에 필요한 사회적 자원은 더욱 고갈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정부 예산의 1%를 여성가족부라는 권력이 부족한 부서에 밀어넣고 소외계층을 위한 돌봄을 배분해왔다. 버틀러의 저작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분배할 것인지 고민하기보다 윤리적 실천을 위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책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해준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디스토피아적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매일 목격하는 삶은 현재진행형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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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3. 8. 24. 16:33

성폭력은 개인적이고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동시에 특징적인 사건이다

 

최근 언론에 이슈화되는 성폭력 범죄를 목도하며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이 무서워졌다, 거리에 다니기 무섭다. 한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치안이 불안한 나라였나? 하지만 되짚어보면 항상 성폭력 사건은 도처에 존재했다. 여성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갔고, 한국 사회를 지배한 연쇄 강력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성폭력이 존재했다. 연쇄살인사건은 사실 여성에 대한 혐오이자 연쇄 성폭력 사건이었고, 살아남은 여성들에게 자행된 '연쇄 강간 사건'이 개입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는 늘 여성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안한 길거리였다.

 

이 지구사회는 성폭력을 포르노 영화로, 불행포르노로, 타인의 불행서사로 충분히 소비하고 곱씹어왔다. 물론 성폭력특별법의 제정과 개정의 과정, 가정폭력처벌법에서의 '아내폭력' 개념의 정립, 스토킹처벌법의 출발 등은 우리 사회가 단지 성폭력을 소비하고만 있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세상이 무섭다'는 말은 과거에는 행복했다는 정서적 착시에 불과할지 모른다. 과거에도 성착취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존재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촬영은 성착취의 수단이 되었고 촬영 데이터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성폭력 수단으로 복제된다. 그래서 청계천 상가에서 수많은 '남성 정체성'들이 불법촬영 비디오를 '빨간xxx'라는 이름으로 소비하고 그것을 과거의 추억으로 소비하고 웃었다. 돈과 유명세를 가진 이들은 클럽에서 약물에 의한 강간 사건을 저지르고 그 결과물을 전리품처럼 채팅방에서 돌려보았다. 또한 불법촬영 피해자의 무너진 삶을 포르노로 소비하며 조롱해왔다.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서 가해자와의 결혼으로서 더럽혀진 정조를 회복하라는 판결을 선고받았다. 성폭력 처벌 법안의 골자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고 피해자가 수치심을 발현하지 않을 경우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성착취는 성별이 분리되지 않은 동성사회 연대 내에서도 충분히 자행되어 왔다. (감추어진 동성 간 성폭력 사건들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해왔을 뿐이다.)

 

갑자기 성별 경쟁에 도태된 이들의 열등감에 의해 성폭력이 특별한 사건으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방식이 진화했을 뿐, 가장 아날로그적인 시대에도 성폭력은 사회의 관습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폭력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사회적 약자들이 나에게 자행되는 것이 폭력이자 착취라고 인식하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세상은 예전에도 지금도 늘 위험하고 불안하다. 사회에서든, 조직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자신이 불안하다고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약자라고 위치지어지는 순간, 상하 관계의 하부를 차지하고 젠더 권력의 하위에 존재하는 순간 세상은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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