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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4. 4. 10. 08:50

마사 너스바움 M.Nussbaum - 혐오와 수치심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

 

마사 너스바움 - 혐오와 수치심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혐오’라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수치심 disgrace’와 맞닿아 있는지 이야기하면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판단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치심과 혐오 사이를 관통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혐오’가 지배적 감정으로 표출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과정이 되었다.

 

    너스바움이 정의하는 혐오는 오물이나 불쾌한 것, 그리고 모두는 근본적으로 동물이라는 대한 거부감과 연관이 있는데, 이는 오물을 배출하며 살아가는 동물성에 대한 혐오로 환원된다. 많은 문화권에서 ‘혐오의 대상’으로서 투사되는 존재들은 ‘더러움’이라는 감정과 연결된다. 자신의 더러움을 인식하는 동시에 타인이 뿜어내는 불쾌함 역시도 혐오로 환원하는 것이다. 여성, 유색인종, 하위계층, 성소수자들은 여러 문화권에서 ‘성기’ 즉 오물의 배출 혹은 이미 배출된 오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너스바움은 특권계층들이 하위계층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동물성을 혐오와 결부시켜왔음을 지적하며 혐오를 통한 제노포비아가 단일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판단에 개입하는 것은 특정 계층이나 성별, 특성에 대한 부당한 법적 제재를 용인하게 만든다. 반대로 오물로 환원되는 대상과 객체들에게는 단순한 부끄러움을 넘어선 ‘수치심’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동물적 속성이 부끄러우며 사회적 체면을 깎아먹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혐오가 사회를 추동하는 기능이 되었다는 윤리학적 분석은 한국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를 침해하는 성폭력이 오랜 시간 ‘수치심’과 연관되어 사회적, 법리적 감정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너스바움은 '건설적 수치심'을 언급하며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성찰하는 건설적 성격이 타인에게 수치심을 부여하는 현상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수치심을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상황적 필연성에 주목하지만, 수치심으로 형벌을 주거나 낙인을 찍고, 인위적으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법으로 규정된 인간의 존엄성에 영향을 미친다. 수치심은 '발현'될 수 있지만 인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수치심의 맥락적 속성은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분석과도 연관이 있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이성과 감정을 서로 분리하여 이성과 합리성에 우월성을 부여해왔지만 사실 혐오와 차별, 통치성과 관련된 사회적 현상은 입증 불가능한 감정적 현상과 관련이 있다. 유아기의 행동들은 합리적 인과관계와는 거리가 멀지만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수치심을 부여받아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남성들은 성장하면서 이상적인 남성성-맨박스Manbox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지만 너스바움의 언급에 따르면 이 수행성은 남성성을 거부하고 싶거나 명확한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소년들에게 일정 이상의 수치심을 안긴다. ‘사회화’는 구성원들에게 수치심을 안김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면서 기능한다. 수치심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맥락적 발현임과 동시에 정상성에 대한 요구이자, 정상 밖의 속성들을 낙인찍는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너스바움의 ‘건설적 수치심’에 관한 질문은 수치심이 혐오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화된 삶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회적 가치와 상호존중 윤리의 가능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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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3. 11. 20. 17:33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What world is this?

 
 
버틀러가 2020년에 써낸 이 책의 영문명은 <what world is this?>이다. 제목만 읽어서는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지금 현재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버틀러는 이 글을 통해 현재 이 세계가 목도하고 있는 두 가지 위기와 사건-팬데믹과 기후 위기-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둔다. 버틀러는 이 세상은 예측하지 못한 비극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낸다는 막스 셸러의 사유를 팬데믹의 발생이라는 현상에 접목했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인용하면서 바이러스는 인간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며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염으로서 인식시켰다고 성찰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우리의 삶은 분명 '변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매개체가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무규칙적인 전파일 거라고 예측할 수 없었을 뿐이다. 비극과 삶의 파괴는 언제 어디서든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전염병은 무규칙적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오미크론이나 델타와 같은 변이 바이러스의 이름을 머리에 인식하면서 우리의 삶에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했다. 서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 접촉하기만 해도, 서로의 침이 교환되거나 스치기만 해도 바이러스는 전염병을 몸 안에 이식할 수 있다. 서로 완전히 다른듯한 타인의 신체는 바이러스를 통해 메를로 퐁티의 사유처럼 '상호 간에 얽혀'간다.
 
하지만 백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정된 자원이자 특혜가 됐다. 사회 지도층은 백신을 접하지 못하는 계층을 방치함으로써 보호받아야 할 생명과 그렇지 못한 생명을 구분했다. 또한 가짜뉴스의 시대에 백신이 완벽하게 전염병을 방지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이용하여 안티백서들이 탄생했다. 백신 반대론자들은 백신의 효과성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하여 백신을 통해 실현 가능한 공공의료에서의 윤리적 가치를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윤리학의 입장에서 적어도 백신은 소외계층이 분배받지 못하고 방치될 특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버틀러는 미국 사회에서 백신소외와 같이 공공의료에서 특정 계층이나 집단을 방치하는 현상과 (흑인에게 가해진) 직접적인 구조적 인종차별이 서로 맞물려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버틀러의 다른 저작인 '비폭력의 힘 The Force of Nonviolence'에서도 생명 간의 계급화와 차별은 '애도가치 worthy of grief'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생명 간에 가치계급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윤리성은 논의되기 어렵고, 평등과 공정함은 윤리가 아니라 지배계층에 의해 분배되어야 할 자원으로 인식된다. 팬데믹 세계에서 백신은 생명의 죽음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누군가는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한정된 자원으로 재의미화되고 있다. 백신을 수입하고 확보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은 백신이 가치화된 자원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은연중에 내재하고 있던 생명 간의 계층격차와 배분받을 수 있는 자원의 한계를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식해간 것이다.
 
   나는 팬데믹이 발생하던 시기에 성착취 피해자들을 위한 공공지원제도를 제공하는 기관에서 종사했다. 이 시기 나는 전염병이 물리적 한계를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성적 착취를 얼마나 다채롭게 재생산하고 있는지 목격했다. 아무리 격리되어 있고 서로 접촉을 피해도 모든 개인은 타인을 괴롭히고 착취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기술은 마치 '상호 얽힘'을 얼마나 비극적인 방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범위에서 발현시키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팬데믹 시기 이후 표면화된 온라인 아동 성착취의 발생건수가 급증했다는 통계는 타당성이 있다.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64408714)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구술언어가 아닌 디지털화된 글자들을 캡션으로 달고 있는 '복사 가능한' 이미지들을 무한 생산했다. 상호 얽힘으로써 사회화되고 발달해가야 할 아동들은 집 안에 격리된 채 비대면 세계의 언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습했고 이미지의 창작자이자 전파자가 되었으며 '이미지'를 가치화해서 소비하는 시장은 더욱 팽창했다. 내가 종사했던 업무의 강도는 이러한 비대면 성착취의 급증이 큰 역할을 했다.
 
 

코로나19 봉쇄 기간 아동 성 착취물 10배 증가 - BBC News 코리아

'성 착취물을 올린 웹사이트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5000곳이었던 데 비해 6만3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www.bbc.com

 
   하지만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은 아주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나는 당시 피해자들을 위한 대민업무를 맡아보면서 이 지원제도가 얼마나 불확실한 기반 위에 놓여져 있으며 이 직업에 종사하는 인력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도움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현재 당신에게는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해야만 했다. 그들은 때때로 실망했고 얄팍한 국가제도에 불만을 퍼부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라도 도움을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자기위로를 했다. 또한 당신은 거기에 허수아비처럼 앉아있는 거냐고 공격했고 당신은 어떤 사람이길래 거기서 고생하고 있냐는 동정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늘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윤리가 아니라는 고민도 있었다. 당시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자원도 한정적이며, 상대방에게도 정해진 자원을 배분할 수밖에 없다. 가장 사명감과 윤리적 마인드셋을 중시하는 공공제도 종사자에게도 '돌봄'의 가치화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자 가장 타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 수많은 윤리적 고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 마련되어 있는 성착취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제도는 불편하게도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 저임금 노동자들의 헌신과 도덕심과 윤리적 사명감을 필요로 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심과 성폭력에 대한 분노의 감정, 같은 여성을 향한 자매애는 우리 사회가 공공제도를 저예산으로 구축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성착취 피해지원에 종사하는 여성 근로자들의 '헌신'도 일종의 가치화된 무형의 자원이라 그 헌신이 고갈되면 더 이상 제도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없고, 피해자들을 위한 '자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공성'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자원화되고 배분 가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다시 생각했다.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물질적이고 고갈 가능한 것인지, 우리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노동력이 헌신으로 치환될 때 얼마나 이 사회가 여성과 성의 문제를 한정된 자원 내에서 해결하거나 방치하고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수치'를 강요당한 이들의 '최소한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위해서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어떻게 연대해 나가야 할까? 
 
  버틀러는 공동체가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앞서 어떻게 전지구적 상호돌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하면서 팬데믹과 기후 위기가 우리가 얼마나 상호 연결된 존재인지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페미니즘 돌봄 네트워크와 사회적 운동, 서로 다른 신체들간의 연대와 거리의 정치는 이 책뿐만 아니라 여러 저작에서 버틀러의 예시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대하고 새로운 윤리적 실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거 성폭력 피해지원 종사자로서 하나의 예를 들었지만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돌봄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가치사회에서 배제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 정부의 여성가족부 예산 삭감으로 인해 소외계층의 돌봄으로 실현되는 공공윤리에 필요한 사회적 자원은 더욱 고갈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정부 예산의 1%를 여성가족부라는 권력이 부족한 부서에 밀어넣고 소외계층을 위한 돌봄을 배분해왔다. 버틀러의 저작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분배할 것인지 고민하기보다 윤리적 실천을 위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책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해준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디스토피아적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매일 목격하는 삶은 현재진행형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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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3. 8. 24. 16:33

성폭력은 개인적이고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동시에 특징적인 사건이다

 

최근 언론에 이슈화되는 성폭력 범죄를 목도하며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이 무서워졌다, 거리에 다니기 무섭다. 한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치안이 불안한 나라였나? 하지만 되짚어보면 항상 성폭력 사건은 도처에 존재했다. 여성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갔고, 한국 사회를 지배한 연쇄 강력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성폭력이 존재했다. 연쇄살인사건은 사실 여성에 대한 혐오이자 연쇄 성폭력 사건이었고, 살아남은 여성들에게 자행된 '연쇄 강간 사건'이 개입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는 늘 여성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안한 길거리였다.

 

이 지구사회는 성폭력을 포르노 영화로, 불행포르노로, 타인의 불행서사로 충분히 소비하고 곱씹어왔다. 물론 성폭력특별법의 제정과 개정의 과정, 가정폭력처벌법에서의 '아내폭력' 개념의 정립, 스토킹처벌법의 출발 등은 우리 사회가 단지 성폭력을 소비하고만 있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세상이 무섭다'는 말은 과거에는 행복했다는 정서적 착시에 불과할지 모른다. 과거에도 성착취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존재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촬영은 성착취의 수단이 되었고 촬영 데이터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성폭력 수단으로 복제된다. 그래서 청계천 상가에서 수많은 '남성 정체성'들이 불법촬영 비디오를 '빨간xxx'라는 이름으로 소비하고 그것을 과거의 추억으로 소비하고 웃었다. 돈과 유명세를 가진 이들은 클럽에서 약물에 의한 강간 사건을 저지르고 그 결과물을 전리품처럼 채팅방에서 돌려보았다. 또한 불법촬영 피해자의 무너진 삶을 포르노로 소비하며 조롱해왔다.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서 가해자와의 결혼으로서 더럽혀진 정조를 회복하라는 판결을 선고받았다. 성폭력 처벌 법안의 골자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고 피해자가 수치심을 발현하지 않을 경우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성착취는 성별이 분리되지 않은 동성사회 연대 내에서도 충분히 자행되어 왔다. (감추어진 동성 간 성폭력 사건들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해왔을 뿐이다.)

 

갑자기 성별 경쟁에 도태된 이들의 열등감에 의해 성폭력이 특별한 사건으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방식이 진화했을 뿐, 가장 아날로그적인 시대에도 성폭력은 사회의 관습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폭력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사회적 약자들이 나에게 자행되는 것이 폭력이자 착취라고 인식하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세상은 예전에도 지금도 늘 위험하고 불안하다. 사회에서든, 조직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자신이 불안하다고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약자라고 위치지어지는 순간, 상하 관계의 하부를 차지하고 젠더 권력의 하위에 존재하는 순간 세상은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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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3. 6. 20. 15:28

브러쉬 업 라이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낄 때, 다시 잠에 들 때 문득 생각한다. 나는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움직였을 뿐인데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 걷지도 못하던 아기는 걸을 수 있게 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아이가 조금씩 삶에 필요한 능력치를 익힌다. 이 삶의 흐름 위에서,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왜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나는 왜 지금의 전공과 직업을 선택하고 삶의 가치관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삶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브러쉬 업 라이프>라는 일본 드라마는 주인공이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인생 N회차의 과정을 그려낸다. 처음에는 지역 공무원이었던 주인공은 인생에서 맞닥뜨린 몇 가지 사건을 반추하며 저승에서 ‘인생 다시 살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약사, TV 드라마 프로듀서, 의학 연구원, 비행기 조종사 등 여러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이전 인생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크로스체크를 통해 자신과 주변인이 곤경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인생을 다시 산다면 주인공처럼 철저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삶의 과오를 지워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섯 번의, 도합 200년 이상의 인생을 산다. 물론 나 역시도 아주 자잘한 실수 정도는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해볼 순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선택지가 열릴 때 다른 길을 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이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철저하게 기억하고 실수를 크로스체크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주인공이 인생을 반복하면서 만나는, 8회차 넘게 같은 인생을 반복하고 있는 후배 공무원 캐릭터가 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행동방식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인생을 반복한다 해도 나는 바꿀 수 있지만 주변은 바꿀 수 없다는 것, 과거의 몇 가지 사건들을 되돌리기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사건들도 많다는 점이다. <브러쉬 업 라이프>의 주인공에겐 갈등을 일으키는 가족이나 친구, 친척들이 없었다. 1989년생인 주인공은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한, 버블경제 붕괴와 경제불황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하루하루 그 시대의 드라마와 노래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대의 경제 불황이나 가계경제의 붕괴, 갈등을 일으키는 주변인들이 존재한다. 주인공의 삶에서 ‘브러쉬 업’ 할 것은 친구를 잃고 젊은 나이에 요절할거라는 두려움 뿐이다.

 

내가 나라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성장해오는 동안, 다시는 되돌리거나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파편들이 삶의 도로 위에 펼쳐져왔다. 사람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파편들을 딛고 성장한다. 인생을 다시 살게 해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수많은 세상의 흐름들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분명히 좌절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 들 때까지, 인생을 다시 ‘브러쉬 업’하고 싶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리며 또 하루의 시간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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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2. 8. 28. 17:45

2022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 (1991)



8월 28일 13:30분 관람. 이 영화를 만든 재일교포 감독 박수남은 먼저 자신이 왜 이국의 땅에서 태어났는지 묻는다. 그리고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부모님의 나라로 가서 오키나와로 갔던 강제징용, 위안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1991년 작품이라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한국 풍경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시골 마을에서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에게 학생운동을 하는 풍물패들이 찾아와서 공연을 하거나, 너무 급작스럽게 발전해서 번영의 길을 걷던 한국의 모습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처음에는 계속 아버지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들이 어떻게 징용되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한국인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려준다. 한국인이 식량을 숨겨둔 동굴을 수색한 척후병 출신의 일본인은 그 당시에 죽은 사람에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안부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 영화의 기류가 변한다. 위안부 이야기를 하는 특공대원 출신은 여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었다며 피식 웃는다. 위안소의 위치를 설명하던 일본인 인터뷰이들은 위안소로 가는 길에 개천이 얼마나 예뻤는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래도 전쟁에서 살아남아서 고향에 갔으니 다행이라고 자화자찬을 한다. 한국 포로들과 징병자들은 쉬는 날마다 인솔자를 따라 위안소로 갔다고 증언한다. 어떤 병사들은 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위안소로 들어가서 고향 이야기만 하다가 오지만, 어떤 병사는 '장난'을 쳤다고 웃었다. 그 증언을 한 80년대의, 경북 지역 어딘가에서 생존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자신도 위안소에 들어가서 '장난'을 쳤다고 머쓱하게 말을 잇는다. 이 증언들은 군국주의가 식민지 남성이 식민지 여성을 착취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는 불편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오키나와의 한국인 위안소를 관리하던 '이케가미 도미요'라는 한국인 여성의 존재가 조금씩 언급된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일본군 장교 출신의 한 일본인은 위안소를 일본군이 운영한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케가미 도미요가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내비친다. 미군측에서 이케가미가 전쟁에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죽이려고 했을 때, 한국인 포로들은 처음에는 같은 한국인인 이케가미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케가미가 끌려온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미군들에게 한국인이 얼마나 힘들게 전쟁에 참여하고 고생하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인 한 사람은 이케가미를 죽이러 갔다고 한다. 이케가미는 후에 미군에 투항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질때쯤 하나 둘 일본군이 투항하려고 할 때 조선인들 역시 투항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등장한다. 30명이 넘는 조선인 병사들은 투항을 위해 같이 있던 한국인 학도대 여성에게 네가 선봉에 서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윽박질러서 그 여성은 옷을 전부 벗고 미군 기지 앞에서 수건을 흔들었다고 한다. 이 증언을 한 할아버지는 '사내답지 못했다'고 자신을 고백한다. 전쟁에 끌려간 '사내'들은 일본군에 의해 자국 여성을 착취했고, 투항을 위해 여성의 몸을 내세웠으며, 배를 곯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한국인 여성을 증오했다. 원형에 가까운 경북 지방의 사투리로 읊어지는 '사내'들의 과거에서 젠더는 역사의 가장 미묘한 지점을 관통한다.

이 영화의 말미에서 박수남 감독은 전쟁 이후 오키나와인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위안부 생존자 배봉기 할머니에 의해, 또한 위안소가 운영되었던 오키나와 자마미 섬의 풍경을 통해 식민지의 교차된 역사들을 조명한다. 이케가미가 자발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했다고 말한 일본군 장교는 말과 나라를 빼앗긴 류큐 왕국의 오키나와인들이 적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일본군에 의해 죽음으로 내던져진 것에 대해 '섬사람들은 정말 순수했고, 전쟁 시기 일본인의 모범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을 떠올렸고, 기시의 기록에서 증언된 류큐인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생각했다. 그들은 본토인과 엄격하게 구분되었지만 전쟁에서 죽음으로 투항할 때만 본토인임을 인정받고 있다. 지금 NHK에서 방송하고 있는 아침 드라마 '치무돈돈'에서 오키나와인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멍청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생각하면, (나는 이 드라마가 어떻게 하면 오키나와를 가장 본토인의 시각에서 희화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 위선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키나와인은 여전히 살아있을 때는 '본토'의 시선에서 편견을 입은 존재로 주변화되고 있다. 그리고 주변화의 또다른 변두리 속에 식민지 조선의 '사내'들과 '위안부의 몸'들이 존재한다. 오키나와의 크고 작은 섬들에는 여전히 교차된 식민지성의 흔적이 존재하고 있다. 전쟁은 생각보다 더 세밀한 식민지와 차별과 변두리의 잔해들을 남긴 채 여전히 기억과 기록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일본은 전쟁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은 끝나거나 종결되지 않고, 후세대에 나비효과를 전하고 있다.

증언들 자체는 불친절하거나 연결성 없이 파편화되고 있지만, 증언의 발언과 가치 자체는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또한 '생존자'들을 미화하거나 그들의 숭고함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변의 언어들은 때때로 전혀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며 상호간의 폭력을 유발한다는 점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주변 정체성을 드러낸 재일교포 여성 감독의 낡은 필름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됐다.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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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0. 10. 10. 17:39

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사피야 우노자 노블의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와 마찬가지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성별 불균형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구조화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캐럴라인 페레스가 제시한 ‘인비지블 우먼’의 개념은 노블이 가진 구글 검색엔진의 성편향적 세계관을 인식론적 측면에서 확장하고 있다. 즉 남성은 기본값이고, 여성은 예외 케이스로 취급해야 하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증명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과제였다. 페레스는 이 책에서 노동, 공공 서비스, 의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어 왔으며 여성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데이터와 합리성이 중요한 세계에서 여성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여성의 ‘예외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큰 맹점은 편향성을 증명하기 위해 주관성이 반영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여성이 공공 서비스나 데이터마이닝에서 어떻게 배제되었는지 전지구적으로 증명된 통계가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수집된 ‘객관적’ 자료들은 편향성에 대한 기대값과 근사값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의 경험적 구술이 이 불균형한 세계를 증명해낼 수 있지만, 문제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 여성들이 배제된 인터넷 세계의 성폭력이 갖는 집단 공동체적 특성, 특히 호모소셜리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는 언제 완료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마무리 시기를 내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연구의 가장 큰 장벽은 모든 증거와 관찰 자료들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많은 언어들, 특히 성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한 말들은 개인의 의견이자 성향으로 치부될 뿐 어떤 사회문화적 특성을 포착해내기 어렵다. 노블과 페레스의 책을 읽으면서 연구힌트를 얻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역시 이 남성화된, 잉여화된 언어에서 어떻게 유의미한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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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8. 6. 17. 16:40

크게 휘두르며 29권


사실 이 시리즈는 경기보다도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멘탈과 테크닉을 관리하고 팀을 꾸려가는 과정이 궁금해서 보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미하시가 본격적으로 투구코칭 받는 부분이랑 학부모회 굴러가는 거 보는 게 제일 재미짐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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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7. 5. 18. 00:28

넷플릭스 버전 신작 앤에 대한 비판 기사



http://www.vanityfair.com/hollywood/2017/05/anne-of-green-gables-netflix-review-anne-with-an-e-bleak-sad-wrong/amp

원작의 앤 시리즈는 공화당 지지자인 매튜 아저씨가 '여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게 옳을까?'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참석하고 온 뒤 앤 앞에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자 그럼 나도 아저씨의 말에 따르겠다고 할 정도로 오래 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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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7. 3. 6. 04:38

티스토리 초대장에 관해

가끔 이 황무지 블로그에 초대장을 원하시는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시기 때문에 이 글을 씁니다.

과거에는 저도 달라고 하면 드렸고 부탁받으면 얼마든지 보내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초대장 보냈다가 광고 블로그 만든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고 방명록이 아니라 게시글에 대뜸 댓글로 초대장 좀 달라고 어딜 봐도 부탁이 아닌 투로 남기고 가시거나 장황한 말투로 소통을 운운하며 초대장 달라고 주절주절 남기고 가시는 분들 때문에 이제는 정말 개인적으로 지인에게 부탁받지 않는 이상 초대장 부탁은 모두 거절하고 있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도 초대장에 관한 안 좋은 경험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초대장 관련 댓글은 모두 삭제하고 있다는 점 알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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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6. 6. 17. 17:45

<활동적 삶 : 한나 아렌트의 정신>_아다 우쉬피즈





이 영화는 한나 아렌트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물론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주고받은 편지들과 나치 시대 이후 아렌트의 하이데거 비판들과 말년에 아렌트가 남긴 방송 인터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소스들은 관객에게 아렌트를 이해시키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물론 영화의 화자는 아렌트다. 주인공도 아렌트가 아닌 건 아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관객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렌트는 주인공이자 관객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의 주제를 서술한다. 화면은 아렌트가 바라보(았을 거라 생각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선' 자체를 한나 아렌트가 독점하게끔 한 것이다. 감독은 아주 최소한의 역할로만 등장한다. 이야기, 시선, 말의 주인은 모두 한나 아렌트라는 한 명의 인간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여성영화라는 수식어가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여성 영화인지, 주제의식 전체를 서술하고 관통하는 '시선'이 여성에게 주어져야 여성 영화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여성영화라는 수식어 자체도 젠더 이분법과 관련이 있는지. 한나 아렌트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여성 영화'라는 수식에 제한할 수 있는 건지 고민했다. 대안적 의미'에서의 여성 영화 자체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이 한나 아렌트 다큐멘터리를 '여성 영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strong objectivity'의 차원에서 객관적인 결론인지 생각했다.


아렌트는 시선을 독점하기 위해, 나치 시대의 학살을 재조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촬영한 필름 위로 나레이션을 읊는다. 하이데거, 야스퍼스, 정확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남편에게 지금 자신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누구인지 이야기한다. 시오니즘, 인종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다원주의와 같은 단어들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세상과 맞닿았는지 말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엄청나게 긴 러닝타임 내내 '영화 속에서 온전히 말할 권리'를 행사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을 중심으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스크린을 채운다. 죽어간 사람, 죽은 사람, 희생당한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장 평범하고 가장 생각 없고 즐거운 시민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인간의 졸렬함, 악함, 잔인함이 괴물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해 장면 하나하나를 모두 가장 평온하고 도시적인 풍경으로만 골라잡았다. 시민들은 즐겁게 웃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아이히만과 나치 군인들도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임무에 충실했다. 시민의 임무는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 중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시민의 의무를 행사한다. 아이히만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 '시민의 의무'에 사유와 성찰이 제거되어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하려 한다. 즉 시민들은 사유와 성찰 없이 명령에 따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이들의 행위는 '악'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속된 반복에도 남는 것은, 이 주제의식을 말하는 사람도, 이 결론을 내린 사람도,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모두 한나 아렌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면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대안적 의미에서의 여성 영화의 범주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미디어 권력 속에서 시선조차도 여성이 독점할 수 있는 기회는 희박하다.






사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위에 서술한 이야기를 짧게라도 하고 싶었지만 당시 관객들은 한국에서의 여성혐오 문제를 감독과 나누려 애썼다. 이번 여성영화제는 그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GV가 계속해서 열렸다.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예민함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때늦은 '유레카'가 여성들이 모든 상황에서 '토로'하려는 욕망을 갖게끔 만들었고 있었다.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말하고 싶어하고 한탄하고 싶어하며 일상적 여성혐오에 '분노'하고 그 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여성도 욕망이 있는 존재라는 1990년대의 문화적 자각 이후에 두 번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낀 부분만 말했다. 너무 긴장해서 다 말하진 못했지만 핵심은 이랬다. 이건 한나 아렌트의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한나 아렌트가 되어서 한나 아렌트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한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내 질문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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