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albina

이런저런 생각들

Rss feed Tistory
영화 2016. 6. 17. 17:45

<활동적 삶 : 한나 아렌트의 정신>_아다 우쉬피즈





이 영화는 한나 아렌트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물론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주고받은 편지들과 나치 시대 이후 아렌트의 하이데거 비판들과 말년에 아렌트가 남긴 방송 인터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소스들은 관객에게 아렌트를 이해시키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물론 영화의 화자는 아렌트다. 주인공도 아렌트가 아닌 건 아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관객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렌트는 주인공이자 관객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의 주제를 서술한다. 화면은 아렌트가 바라보(았을 거라 생각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영화의 '시선' 자체를 한나 아렌트가 독점하게끔 한 것이다. 감독은 아주 최소한의 역할로만 등장한다. 이야기, 시선, 말의 주인은 모두 한나 아렌트라는 한 명의 인간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여성영화라는 수식어가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여성 영화인지, 주제의식 전체를 서술하고 관통하는 '시선'이 여성에게 주어져야 여성 영화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여성영화라는 수식어 자체도 젠더 이분법과 관련이 있는지. 한나 아렌트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여성 영화'라는 수식에 제한할 수 있는 건지 고민했다. 대안적 의미'에서의 여성 영화 자체의 의미를 생각했을 때 이 한나 아렌트 다큐멘터리를 '여성 영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strong objectivity'의 차원에서 객관적인 결론인지 생각했다.


아렌트는 시선을 독점하기 위해, 나치 시대의 학살을 재조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촬영한 필름 위로 나레이션을 읊는다. 하이데거, 야스퍼스, 정확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남편에게 지금 자신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누구인지 이야기한다. 시오니즘, 인종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다원주의와 같은 단어들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세상과 맞닿았는지 말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엄청나게 긴 러닝타임 내내 '영화 속에서 온전히 말할 권리'를 행사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얼굴을 중심으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스크린을 채운다. 죽어간 사람, 죽은 사람, 희생당한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장 평범하고 가장 생각 없고 즐거운 시민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인간의 졸렬함, 악함, 잔인함이 괴물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해 장면 하나하나를 모두 가장 평온하고 도시적인 풍경으로만 골라잡았다. 시민들은 즐겁게 웃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아이히만과 나치 군인들도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임무에 충실했다. 시민의 임무는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 중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시민의 의무를 행사한다. 아이히만은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 '시민의 의무'에 사유와 성찰이 제거되어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하려 한다. 즉 시민들은 사유와 성찰 없이 명령에 따르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이들의 행위는 '악'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속된 반복에도 남는 것은, 이 주제의식을 말하는 사람도, 이 결론을 내린 사람도,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모두 한나 아렌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면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대안적 의미에서의 여성 영화의 범주에서 탈락할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미디어 권력 속에서 시선조차도 여성이 독점할 수 있는 기회는 희박하다.






사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위에 서술한 이야기를 짧게라도 하고 싶었지만 당시 관객들은 한국에서의 여성혐오 문제를 감독과 나누려 애썼다. 이번 여성영화제는 그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GV가 계속해서 열렸다.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예민함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때늦은 '유레카'가 여성들이 모든 상황에서 '토로'하려는 욕망을 갖게끔 만들었고 있었다.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말하고 싶어하고 한탄하고 싶어하며 일상적 여성혐오에 '분노'하고 그 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여성도 욕망이 있는 존재라는 1990년대의 문화적 자각 이후에 두 번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낀 부분만 말했다. 너무 긴장해서 다 말하진 못했지만 핵심은 이랬다. 이건 한나 아렌트의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한나 아렌트가 되어서 한나 아렌트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한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내 질문은 거기까지였다.

,
영화 2015. 5. 31. 22:5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5월 31일자 감상 - 폭력의 그늘


폭력의 그늘 

: 안나에 대하여/달링/세상은 변한다/마크라메/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 신세 한탄을 하고 꿈을 피하려고 밤에 깬다 


제목은 '폭력의 그늘'이라고 붙였지만 이 단편선의 핵심 주제는 "가정폭력과 친족성폭력, 아동학대 등 광범위한 성학대가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해야 옳다.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안나에 대하여'를 제외하면 애니메이션, 콜라주 등 다양한 연출법을 활용해 학대 피해자의 갉아먹힌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고목나무, 분해된 아기 인형, 묶인 손, 눈물 흘리는 아기의 사진, 더러운 천조각들과 여기저기 녹슨 흔적 등 기묘한 은유들이 이 단편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론 마지막으로 상영한 작품인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 신세 한탄을 하고 꿈을 피하려고 밤에 깬다'가 보여준 연출법이 지금까지 본 어떤 학대 관련 작품보다도 가장 직설적이고 가장 적나라했다고 본다. 


('세상은 변한다'는 부득이하게 늦게 도착해서 10분 후에 입장하게 돼서 못 봤고, '마크라메'부터 봤다.)


'마크라메'는 성폭력 피해자의 원치 않는 임신에 관해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그녀는 아이를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하지만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생부의 뒤를 따라간다. 여자의 퀭한 눈빛, 여자를 감싸고 있는 코바늘 레이스, 그녀와 아이의 보금자리인 깊게 패이고 썩은 고목들이 그녀의 상황을 드러내 보여준다.


'달링'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하는 장면을 물감의 질감으로 그려낸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다. 남자는 여자를 옥죄고,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자신이 결혼했었고 임신도 했었음을 자각한다. 


'안나에 대하여'는 오랫 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던, 현직 배우이자(내용을 보면 포르노 배우인 것 같다)친족성폭력 피해자인 안나가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미묘하게 냉대받는 과정을 그린다. 가족들은 안나에게 왜 떠났는지, 왜 돌아왔는지 설명하라고 독촉하지만 안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안나는 사촌 오빠인 테오를 연인으로 사랑했지만 테오는 어린 안나를 성폭행했다. 혹은 어린 안나는 오빠의 행위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안나가 오빠에게 애인이라는 약속을 받지만 결국은 오빠와 함께 놀던 나무를 도망치는 장면은 이 상황이 명백한 '폭력'이었음을 드러내는 은유였다. 어린 안나는 세면기에서 옷을 빨던 그 시점에 오빠와 자신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안나의 과거 일은 철저하게 감춰진 상황이다. 아버지는 안나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라고 말하고, 역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논의하는 가족들을 보며 안나는 자신이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고 숨을 삼킨다. 안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며, '피해자성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안나가 포르노 배우라는 것을 알고 인터뷰하러 온 친구는 안나에게 자극적인 질문을 늘어놓지만 안나는 시종일관 친구의 질문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안나가 어떤 말을 내뱉기 전에 영화가 끝나 버린다.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 신세 한탄을 하고 꿈을 피하려고 밤에 깬다'는 여러 소품들을 벽에 붙여놓고 콜라주하여 학대 피해자의 내면을 연출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벽에 어지럽게 붙은 소품들과 쓸쓸한 풍경들, 분노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주인공의 나레이션들은 구동독 외곽 지역 청년들의 암울한 삶을 넌지시 드러내는 것 같다. 작품설명을 보면 주인공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은 1989년이다. 주인공은 '어떤 수술'을 받고 생식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만 주인공을 수술한 의사는 변태성욕자였다. 주인공의 친구들은 파티를 연다. 연출자가 아기 인형을 조각조각 분해해 놓고 피칠갑된 벽에 붙여놓은 뒤 철사로 인형의 성기를 찌르는 와중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과거 학대 경험을 달뜬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 외 많은 주변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 다 자란 소년 소녀들, 더 자란 청년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내동댕이쳤다. 주인공은 거리의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지만 아이들은 주인공을 발로 걷어차며 폭력을 되갚는다. 나레이션은 나는 그 애들을 학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영혼을 제거당하고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다. 어쩌면 학대가 도돌이표되고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편의 압권은 마지막 부분. 인형을 분리하고 학대하는 와중에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차마 똑바로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인 은유'였다고 생각한다. 


,
영화 2015. 4. 29. 21:09

미미 차카로바Mimi Chakarova - The Price of Sex






예전에 어떤 상영에서 본 적이 있는 영화인데...(삼청동에서 봤었는데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성매매를 다룬 작품 중 다큐멘터리의 본질과 주제의식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대상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데 급급한 성매매나 성폭력 관련 영화의 불편한 묘사법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성의 '그늘'과 '목소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여성들 뿐 아니라 성매매 산업에 관련되어 있는 남성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들리게끔 연출했기 때문에 

무작정 대책없이 분노하기보다는 성산업의 '구조'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에 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언젠가 다시 상영한다면 꼭 찾아가서 보고 싶은 작품. 

,
TOTAL TODAY